[그때와 지금] 국민국가를 위한 텃밭 조철호의 ‘조선소년군’
젖비린내 나는 아동도 결혼을 하면 성인 대접을 받았기에 조혼이 성행하던 한 세기 전. 이 땅의 소년들에게는 자손을 낳아 대를 잇는 의무가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3·1운동은 이들의 두 어깨에 민족의 미래가 달려 있음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국민국가를 만들고 싶어 했던 이들은 소년을 목청껏 호명(呼名)했다. “우리의 현재요, 장래의 살 길을 위해 긴급한 말씀을 드릴 곳이 어디입니까. 하늘입니까. 하늘은 말이 없습니다. 땅입니까. 땅은 손이 없습니다. 어른들입니까. 어른들은 늙고 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서러운 사정을 할 곳도 여러분이요, 다가올 앞날의 큰일을 부탁할 곳도 여러분밖에 없습니다.” 1921년 춘원 이광수가 쓴 ‘소년에게’(『개벽』 17호)에는 이러한 소망이 잘 담겨 있다. 그해 11월 워싱턴 군축회의가 열리던 날 춘원은 ‘민족개조론’을 탈고했다. 그때 그를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은 미국이 주도하는 파리강화회의(1919년)와 워싱턴 군축회의(1921년 11월~1922년 2월)가 독립을 가져다 줄지도 모른다는 소망을 품었다. “내가 소년군 발기에 뜻을 둔 것은 5년 전인 1919년이다. 1차 세계대전 대포격에 잠을 깨어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린 파리강화회의와 보조를 같이 하였다.” 소년의 개조가 민족의 개조임을 확신한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사 조철호는 그해 10월 5일 ‘조선소년군’을 창설했다. “먼저 사람이라는 그 자체의 개조로부터 시작하여 이 사회의 모든 허식과 악습을 바꾸고자 함입니다. 그러함에는 사람의 시초인 소년의 개조에 착수하여 그들로 하여금 사회를 위하고 자기를 위하기에 최적절한 자각과 시련을 갖게 하고자 함이외다.” 1909년 군사 유학생으로 일본에 갔던 그와 동기생들은 망국의 비보에 접해 “기왕 군사교육을 배우려고 왔으니 끝까지 배워 임관한 다음 중위가 되는 날 모두 탈출하여 광복운동에 나서자”는 데 뜻을 모았다. 1913년 일본육사를 함께 졸업한 지청천은 독립군이 되었고 홍사익은 전범재판의 희생양이 되었지만, 그는 3·1운동을 계기로 국민국가를 만들기 위한 터 닦기 작업인 소년운동에 몸을 던졌다. 1926년 6·10만세 운동에 깊이 간여한 그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간도로 몸을 숨겨 교편을 잡았지만, ‘산에 사는 까마귀야 시체 보고 우지 마라 몸은 비록 죽었으되 혁명정신 살아있다’는 노래를 부르다 조선독립을 외치며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는 제자의 기억마냥 독립에의 열망은 식을 줄 몰랐다. 보성전문학교 교련교관으로 근무하던 1941년 봄. 그는 “나는 일을 다 하지 못하였는데”라는 말을 남기고 미처 다 펼치지 못한 큰 나래를 접었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