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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와 지금] 유럽 통합의 원조 샤를마뉴는 문맹

캐나다의 스포츠 영웅으로 최근 상원의원에 임명된 자크 드메르(사진). 그는 4년 전 자신이 문맹자라는 사실을 공개해 캐나다 사회를 놀라게 했다. 유럽 역사에서 가장 지속적인 영향력을 미친 인물을 한 사람만 꼽는다면 단연 샤를마뉴(742~814)다. 분열된 유럽을 통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서기 800년 샤를마뉴의 황제 즉위는 세계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사건이었다. 2일 리스본 조약 비준동의안이 아일랜드 국민투표를 통과함으로써 정치통합이 가속화된 유럽연합(EU)도 따지고 보면 샤를마뉴의 유럽 통일에 대한 '역사적 기억'에서 비롯됐다. 그는 1165년에 시성(諡聖)됐고 '성 샤를마뉴의 날'은 프랑스 어린이들을 위한 축제일로 자리 잡고 있다. 엄청난 정력과 만족할 줄 모르는 지적 호기심을 가진 샤를마뉴는 다방면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신민의 교육 수준을 높이려 했고 단호한 의지로 학문을 부흥시키고자 했다. 중세 초기 서양은 지독한 문맹 사회였지만 샤를마뉴의 열정에 힘입어 그의 생전에 학문이 부활했다. 이른바 '카롤링거 르네상스'가 활짝 꽃을 피운 것이다. 제국 영토 전역에서 샤를마뉴보다 더 열정적인 학생은 없었다. 자신이 주도한 개혁을 지속시키고 또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는 당대의 가장 명석하고 유능한 인물들을 불러 모았다. 샤를마뉴의 궁정 학교는 국내외에서 초빙된 탁월한 학자들로 인해 바야흐로 명문 아카데미가 됐다. 자기 계발에 대한 그의 관심은 거의 애처로울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여가 시간에 글쓰기를 익히기 위해 침상 베개 밑에 늘 서판(書板)을 가져다 놓을 정도로 열심이었음에도 끝내 글 쓰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문맹자였던 것이다. 캐나다의 스티븐 하퍼 총리가 얼마 전 아이스하키 팀 감독이자 해설가인 자크 드메르(65)를 상원의원으로 지명했다. 놀랍게도 그는 문맹자였다. TV 해설을 하면서 자료를 읽는 체 '연기'를 했고 심지어 부인에게도 문맹을 감췄다. 그는 2005년 자신의 부끄러운 비밀을 스스로 공개해 캐나다 사회를 놀라게 했다. 어린 시절 술주정뱅이 아버지의 학대 때문에 도저히 글을 익히고 책을 볼 시간이 없어 학업을 포기했다고 한다. 하지만 문맹을 고백한 후 알파벳 공부를 시작해 신문 읽기와 초보적 글쓰기도 가능해졌다. 그는 문맹 퇴치에 힘을 보태는 의정활동을 펴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학벌 공화국'인 우리 사회에도 이런 식의 인재등용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우리의 인간관.교육관에 근본적 성찰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10-05

[그때와 지금] 국민국가를 위한 텃밭 조철호의 ‘조선소년군’

젖비린내 나는 아동도 결혼을 하면 성인 대접을 받았기에 조혼이 성행하던 한 세기 전. 이 땅의 소년들에게는 자손을 낳아 대를 잇는 의무가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3·1운동은 이들의 두 어깨에 민족의 미래가 달려 있음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국민국가를 만들고 싶어 했던 이들은 소년을 목청껏 호명(呼名)했다. “우리의 현재요, 장래의 살 길을 위해 긴급한 말씀을 드릴 곳이 어디입니까. 하늘입니까. 하늘은 말이 없습니다. 땅입니까. 땅은 손이 없습니다. 어른들입니까. 어른들은 늙고 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서러운 사정을 할 곳도 여러분이요, 다가올 앞날의 큰일을 부탁할 곳도 여러분밖에 없습니다.” 1921년 춘원 이광수가 쓴 ‘소년에게’(『개벽』 17호)에는 이러한 소망이 잘 담겨 있다. 그해 11월 워싱턴 군축회의가 열리던 날 춘원은 ‘민족개조론’을 탈고했다. 그때 그를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은 미국이 주도하는 파리강화회의(1919년)와 워싱턴 군축회의(1921년 11월~1922년 2월)가 독립을 가져다 줄지도 모른다는 소망을 품었다. “내가 소년군 발기에 뜻을 둔 것은 5년 전인 1919년이다. 1차 세계대전 대포격에 잠을 깨어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린 파리강화회의와 보조를 같이 하였다.” 소년의 개조가 민족의 개조임을 확신한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사 조철호는 그해 10월 5일 ‘조선소년군’을 창설했다. “먼저 사람이라는 그 자체의 개조로부터 시작하여 이 사회의 모든 허식과 악습을 바꾸고자 함입니다. 그러함에는 사람의 시초인 소년의 개조에 착수하여 그들로 하여금 사회를 위하고 자기를 위하기에 최적절한 자각과 시련을 갖게 하고자 함이외다.” 1909년 군사 유학생으로 일본에 갔던 그와 동기생들은 망국의 비보에 접해 “기왕 군사교육을 배우려고 왔으니 끝까지 배워 임관한 다음 중위가 되는 날 모두 탈출하여 광복운동에 나서자”는 데 뜻을 모았다. 1913년 일본육사를 함께 졸업한 지청천은 독립군이 되었고 홍사익은 전범재판의 희생양이 되었지만, 그는 3·1운동을 계기로 국민국가를 만들기 위한 터 닦기 작업인 소년운동에 몸을 던졌다. 1926년 6·10만세 운동에 깊이 간여한 그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간도로 몸을 숨겨 교편을 잡았지만, ‘산에 사는 까마귀야 시체 보고 우지 마라 몸은 비록 죽었으되 혁명정신 살아있다’는 노래를 부르다 조선독립을 외치며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는 제자의 기억마냥 독립에의 열망은 식을 줄 몰랐다. 보성전문학교 교련교관으로 근무하던 1941년 봄. 그는 “나는 일을 다 하지 못하였는데”라는 말을 남기고 미처 다 펼치지 못한 큰 나래를 접었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10-04

[그때와 지금] 가슴과 어깨에 벚꽃을 꽂고 희생 다짐하는 18세 조종사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1909년 창경궁의 이름을 창경원으로 바꾸었다. 나라를 빼앗긴 왕조의 궁궐에 우리가 즐비하게 들어서자 장희빈이 사약을 받고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혔던 창경궁의 옛 역사는 동물들의 울음 속에 묻혀버렸다. 일본을 상징하는 수천 그루의 벚나무도 궁 이곳저곳에 심어졌다. 70년대까지 '창경원 밤 벚꽃놀이'는 하루 20만의 인파가 몰릴 만큼 큰 축제였다. 83년 창경원은 다시 창경궁이 되었고 벚나무는 들어내졌다. 그러나 진해 군항제에서 서울 여의도 윤중로 벚꽃축제까지 상춘객들이 넘쳐흐르는 오늘 벚꽃놀이는 우리 생활 깊숙이 배어든 일제 유산이 되었다. "서로 사랑하기만 한다면 사랑으로만 살기 원했듯 사랑으로만 죽는 것도 좋습니다/ 벚꽃처럼 화려한 절정에서 한꺼번에 이 세상 모든 게 져내려도 좋습니다." 김하인이 벚꽃에 비긴 사랑예찬은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그러나 일본 군국주의는 꽃비 속을 거닐던 30년대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의 가슴을 사랑으로 한껏 달뜨게 놓아두지 않았다. 태평양전쟁(1941~45) 당시 가미카제 전투기는 미군 함대를 향해 꽃잎처럼 떨어져 내렸다. 벚꽃을 가슴과 어깨에 꽂고 희생을 다짐하던 18세짜리 앳된 조종사의 사진이 애처롭다(출처: '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 오오누키 에미코 저 이향철 역 모멘토). 그때 조선의 젊은이 11명도 '대동아 공영'의 미명 아래 사지로 내몰렸다. 일본 문부성 검정을 통과한 후소샤판과 지유사판 왜곡 교과서는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군국의 가치를 가르치고 싶어 한다. "천황 즉 일본을 위해 져라." 국가라는 전체를 위해 너 자신을 희생하라고 말이다. 벚꽃이 군국주의 일본의 상징 모티브로 다시 부상할 것 같은 오늘이다. 그래서 난분분 난분분 떨어져 내리는 벚꽃의 향연을 마음 편히 즐기기 쉽지 않다. "펑! 튀밥 튀기듯 벚나무들/ 공중 가득 흰 꽃밥 튀겨놓은 날/ 잠시 세상 그만두고/ 그 아래로 휴가 갈 일이다." 황지우의 시구처럼 벚나무 아래서 더 머물고 싶은 게 봄날을 즐기고 싶은 모든 이의 마음인데 말이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10-02

[그때와 지금] 설·추석 명절 대이동···의외로 짧은 '반세기 진통'

설과 추석 이른바 '양대 명절'의 민족 대이동은 오늘날 가장 한국적인 현상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사람들은 차 안에서 주리를 틀 생각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오랜 풍습이려니 하면서 집을 나선다. 그러나 이 집단 귀성 전통이 만들어진 지는 50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한 세기 전만 해도 보통 사람들의 추석날 일과는 아침에 차례 지내고 뒷산에 올라 성묘한 뒤 마을 사람들과 달이 기울 때까지 술 마시며 노는 것이었다. 물론 남정네들 뒤치다꺼리에 하루가 짧았던 부녀자는 예외였지만. 인구의 절대 다수가 태어난 곳에서 그대로 눌러 살다 죽던 시절에 귀성이 사회 문제가 될 리 없었다. 더구나 추석을 비롯한 명절 문화는 일제강점기에 크게 위축되었다. 일제가 한국 문화 말살 정책을 편 데다 일요일과 일본의 축일들이 전통 명절을 조금씩 흡수해 갔기 때문이다. 1923년 추석을 앞두고 한 한글 신문은 '추석 명절을 부흥하라'는 사설을 실어 명절 정취가 사라지는 만큼 민족의 생기도 줄어든다고 개탄했다. 추석 특별열차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21년이었는데 이 열차는 귀성 열차가 아니라 '달구경(觀月) 열차'였다. 서울역에서 오후 6시30분에 출발하여 수원 서호(西湖) 임시정거장에 승객들을 내려주고 오후 11시30분에 태워왔다. 귀성 열차라는 이름은 35년에 처음 등장한다. 그런데 이 열차는 성묘객이 아니라 방학을 맞아 귀향하는 학생들을 수송했다. 추석은 광복 뒤 46년부터 임시 공휴일이 되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법정 공휴일의 자격을 얻었다. 전우용〈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

2009-10-01

[그때와 지금] 한국군 3사단 38선 돌파···'국군의 날' 기원 만들다

1950년 10월 1일 한국군 23연대 3대대가 강원도 양양에서 38선을 돌파했다.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38선 이북 지역에서 군사작전을 실시해도 된다는 명령이 내려가기 일주일 전의 상황이었다. 왼쪽 사진은 국군 제3사단과 미군 장병들이 '38선 돌파' 표지판 앞에서 촬영한 것이다. 뒤쪽에 정래혁 중령(손으로 입을 가린 사람)도 보인다. 한국군의 38선 돌파는 보름 전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급격하게 무너진 북한군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동부전선에서 먼저 이루어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한국군이 처음으로 38선을 돌파한 날을 기념해 1956년 9월 4일 대통령령 제1117호로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제정했고 3사단에는 38선 돌파 기념비를 세웠다.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황이 역전되고 38선 이북으로 진격해 압록강에 도달했던 사실은 한국군에 하나의 전설로 기억되고 있다.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으니까. 그러나 38선 돌파가 미국에는 한국에서와는 전혀 다른 기억과 평가로 남아 있다. 미국의 합동참모본부에서 공간한 '한국전쟁'(대한민국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번역)에 따르면 38선 돌파는 하나의 '재앙'을 불러온 사건이었다. 유엔의 모호한 결정을 맥아더 장군이 자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38선 돌파가 이루어졌으며 이로 인해 미국은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는 것이다. 중국과의 결전으로 인해 냉전과정에서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는 것이다. 38선 돌파는 맥아더 개인에게도 재앙이 되었다. 맥아더 장군은 중국군이 참전한 이후 행정부의 극동정책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중국 본토에 대한 공중 공격 및 해상봉쇄를 포함한 군사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에 대해 "대통령으로서 그리고 군통수권자로서의 나의 명령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이었으며 "더 이상 그의 불복종을 참을 수 없었다"면서 그를 해임했다. 그리고 지금 미국의 역사학자들은 한국전쟁을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개입'을 한 전쟁으로 평가하고 있다. 역사적 사실은 변화하지 않는다. 그러나 같은 유엔의 깃발 아래서 싸웠던 한국과 미국 사이의 이러한 상반된 기억과 평가는 우리에게 다시 한번 역사를 뒤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너무 우리 중심으로만 생각하고 사는 것은 아닐까?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현대사〉

2009-09-30

[그때와 지금] 최초의 근대식 병원 제중원, '어린애 잡아먹는 곳' 오해

"앞선 나라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정책은 첫째가 위생이요 둘째가 농상(農桑)이요 셋째가 도로이다. 그들이 의술을 기술 중 제일로 치는 이유는 사람의 생명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를 둘러본 외국인들은 조선이 산천은 아름다운데 인구가 적어 부강을 꾀하기 힘들고 도로가 사람과 가축의 똥오줌으로 범벅 되어 있어 두렵다 한다." 1882년 일본을 둘러본 뒤 부강한 국민국가를 세우고 싶어 했던 김옥균의 꿈은 그해에 쓴 '치도약론'에 잘 담겨 있다. 호열자(콜레라)가 창궐해 수십만 명이 죽어나가던 그 무렵. 그는 도로에 넘쳐흐르는 분뇨를 논밭에 비료로 쓰면 전염병을 막고 농업생산성도 올릴 수 있으며 아울러 물자의 유통도 원활하게 하는 일거삼득의 이가 있다고 보았다. 부국강병의 토대인 국민의 건강을 지켜 인구를 불릴 위생의 책임이 국가에 있음을 깨달은 그는 이를 담당할 '위생경찰' 제도와 서양의학을 들여오고 싶어 했다. "피가 흐르는 경두골 동맥을 명주실로 꿰매고 귀 뒤 연골과 목 척추도 봉합했다." 갑신정변 때 자객의 칼에 치명상을 입은 민영익을 알렌은 살려냈다. "폭동이 있은 지 얼마 후 국왕과 면담하는 중에 서양의 병원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고 수술에 대한 설명과 그 이점이 왕의 흥미를 끌어 알렌에게 서울에 병원을 세웠으면 좋겠다고 암시했다." 육영공원 교사 길모어의 증언처럼 정변 실패는 부국강병을 바란 김옥균의 꿈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지만 이듬해인 1885년 최초의 근대적 병원 제중원(濟衆院)이 이 땅에 들어서는 계기로 작용하는 역설을 낳았다. "의사의 학술은 정교하고 우량한데 특히 외과가 뛰어나다. 질병에 걸린 자는 본 병원에 와서 치료할 것이며 약값은 국가가 대줄 것이다." 그러나 사대문과 종각에 붙었던 공고문은 그때 왕실이 근대적 의미의 위생사업에 발 벗고 나선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때 제중원의 개원은 백성들에 대한 왕실의 시혜를 보여주는 혜민서와 활인서의 기능에 신묘한 서양의술을 더한 전통적 휼민책(恤民策)의 연장에 지나지 않았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9-29

[그때와 지금] '돈키호테' 작가 세르반테스 탄생···스페인의 번영과 몰락 문학에 담다

9월 29일은 스페인의 위대한 작가 세르반테스(1547~1616.사진)가 태어난 날이다. 그는 스페인이 신대륙 진출과 더불어 가난하고 촌스러운 나라에서 벗어나 세계 열강의 반열에 오른 16세기 중반에 태어나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에 격파당한 뒤 서서히 몰락의 길에 들어선 17세기 초에 죽었다. 아버지 시대의 비상(飛上)과 아들 시대의 추락을 모두 경험한 작가였기에 소설 '돈 키호테'(1605)에는 그 시대의 '정신분열적 이중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세르반테스는 영웅시대의 마지막 황혼기를 승승장구한 인물로 저 위대한 승리의 전쟁 레판토 해전에 출전한 전쟁 영웅이었다. 그는 이 전쟁에서 총에 맞아 왼쪽 팔을 잃었다. 귀국하던 중 알제리의 해적들에게 나포되어 5년 넘도록 갤리선에서 노를 젓는 노예 신세가 되었지만 이 시기에도 동료 포로들의 탈출을 돕는 등 용맹을 잃지 않았다. 1580년 포로 상태에서 풀려나 펠리페 2세의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세월은 변했다. 카를 5세의 영웅적이고 기사도적인 시대는 사라지고 권태와 환멸만이 가득했다. 소설의 공동 주인공인 돈 키호테와 산초 판사는 세르반테스가 살았던 영웅적 '가상세계'와 환멸의 '현실세계'를 각각 대표하는 인물이다. 16세기 중반과 17세기 초 스페인의 이중성을 구현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르반테스는 완벽한 '시대의 아들'이요 자기 시대의 기록자였다. 세르반테스의 문학은 위대하다. 하지만 겨우 한 세기 전성기를 누리다 사치.낭비와 무능한 리더십으로 몰락한 스페인 제국은 우리에게 반면교사로 다가온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9-28

[그때와 지금] 창호지가 사라지자 소통은 단절로…

1880년 원산에 세워진 일본영사관을 필두로 1890년대 들어 서구 열강의 공관 가톨릭 성당과 개신교 교회 그리고 외국상관 등 서양식 건축물들이 도회와 개항장에서 눈에 띄게 늘어나자 이 땅 사람들의 주거생활에도 양풍(洋風)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색을 입힌 돌 위에 쇠난간을 두른 베란다로 둘러싸인 두 개의 정원을 가로질러 응접실로 안내됐다. 방 안에는 외국산 탁자와 약간 촌스러워 보이는 벨벳 의자들이 놓여 있었는데 아취 있는 벽과 깨끗한 마루와 어딘가 어울리지 않았다. 서로 다른 시간을 가리키고 있는 프랑스식 시계들이 그 증거처럼 느껴졌다." 1890년대 중반 여주의 한 양반가 집 안 풍경을 묘사한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목격담은 이를 잘 말해준다. 왕실을 필두로 고위관료와 재력가들은 앞다퉈 양옥을 짓거나 한옥을 양식으로 개량했다. 문짝의 창호지를 뜯어내 유리를 끼웠고 대청마루를 응접실로 바꿨으며 목욕탕도 집 안에 들였다. 부호들은 재력을 과시하고자 수입 가구를 집 안 가득 채웠다. 프랑스제 뻐꾸기시계 독일제 거울과 카펫 그리고 침대는 그때 개화와 부의 상징이었다. 1923년 김유방은 '개벽' 34호에 실은 글에서 양옥 보급의 필요성을 힘주어 말했다. 일제 치하를 거쳐 해방 이후 양옥이 전통가옥을 대체하면서 주거문화에 일대 격변이 일었다. 사랑채.안채.아래채 별개의 채로 연결된 열린 주거 공간이 안방 거실 주방 화장실 등 하나의 공간 속 닫힌 방으로 바뀌었다. 창호지 한 장으로 막아 숨소리나 기침 소리까지 넘어 나오던 소통의 문도 현관 철문과 나무문으로 바뀌자 이웃은 물론 가족 간의 단절은 깊어만 갔다. 장작을 때서 온돌을 덥히던 시절 따뜻한 아랫목은 할아버지.할머니 차지였지만 도시와 농촌을 가릴 것 없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아파트 밀림 속 우리의 거실에는 더 이상 윗목은 없다. 가족 성원 사이의 서열이 뒤집힌 오늘. 이웃과 가족 모두에게 열려 있던 옛 주거문화가 그리운 것은 무슨 까닭일까?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 근현대사〉

2009-09-27

[그때와 지금] 샤를마뉴 대제 '유럽 통합의 꿈' 1200년 지난 뒤 EU가 이어받다

서양 역사에는 카이사르 샤를마뉴 나폴레옹 등 세 명의 영웅이 등장해 전 유럽을 지배했다. 이들 세 사람 가운데 역사상 가장 지속적인 영향력을 미친 인물은 샤를마뉴다. 서기 742년 4월 2일은 샤를마뉴가 태어난 날이다. 지중해를 에워싼 세 대륙을 무대로 삼았던 세계제국 로마가 5세기에 멸망한 뒤 서양 역사의 무대는 유럽으로 축소되었다. 게르만족의 지배하에 들어간 유럽은 정치적 구심점 없는 지리멸렬 상태를 면치 못했다.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는 분열되었던 유럽을 통일했다. 샤를마뉴가 서기 800년 12월 25일에 서로마 황제로 즉위한 사건은 '세계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중대 사건'이었다. '유럽'이 탄생한 것이다. 그의 제국은 오래가지 않았다.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토록 힘들여 통합한 대제국은 다시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북쪽에서 무시무시한 바이킹 배들이 대담무쌍하게 센 강 루아르 강의 물길을 따라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들의 발길이 미치는 곳마다 공포가 전염병처럼 번졌고 제국의 권위를 보여주는 증거들은 남김 없이 파괴되었다. 샤를마뉴가 죽은 지 31년 뒤인 845년에는 파리마저 약탈당했다. 설상가상으로 이번에는 이슬람교도들이 남쪽으로부터 침입해 들어와 로마를 공격했고 성베드로 성당과 사도들의 무덤을 모욕했다. 게다가 유목민인 마자르족이 제국의 동쪽 변방으로 침투해 들어와 파괴를 일삼았다. 북에서 남에서 동에서 외적들이 거의 동시에 침입했다. 샤를마뉴의 후손들은 제국의 정치적 통일을 유지할 능력이 없었다. 유럽은 다시 한번 서로 대립하고 적대하는 작은 세력들로 분열되었다. 그러나 통일의 역사적 기억은 그 뒤 잊힌 적이 없었다. 유럽연합(EU)은 그 기억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샤를마뉴의 '하나의 유럽'을 재현하자는 것이다. 사진은 EU 집행위원회 일부가 입주한 벨기에 브뤼셀의 '샤를마뉴 빌딩'이다. 이 건물에서 한.EU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진행되기도 했다. EU는 2007년 말 리스본 조약 합의를 통해 경제통합을 넘어 정치통합의 꿈에 다가섰다. 하지만 글로벌 경제위기로 동.서 유럽 간 갈등이 부각되면서 '하나의 유럽' 개념이 흔들리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천년도 훨씬 넘게 지속된 통일의 기억이 쉽사리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문제는 우리다. 통일의 역사적 기억을 갖지 못한 동아시아 3국의 미래를 고민해야 할 때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9-25

[그때와 지금] 자주국방 꿈꾼 박정희, 핵 개발은 아직도 논란

1978년 9월26일 충남 서산군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3부 요인과 존 베시 주한미군 사령관 등이 보는 가운데 NHK-1 제9호 미사일 발사 실험이 있었다. 실험은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보도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60년대 말 안보 위기 이후 자주국방을 내세우면서 군수산업 육성에 박차를 가했다. 이를 위해 71년 청와대에 군수산업 진흥을 책임지는 경제 제2 수석비서관실을 신설했다. 오원철 경제 제2 수석비서관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71년 12월에 이미 미사일 개발의 필요성을 지시했다고 한다. 미사일 개발이 보다 본격화된 것은 75년 남베트남이 패망한 이후였던 것으로 보인다. 분단국가였던 한국에 큰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한국 정부의 미사일 개발 상황을 집요하게 감시했다. 그러나 더 논란이 된 것은 당시 한국 정부의 핵 개발 문제였다. 70년대 말 카터 행정부와 박정희 정부 사이의 갈등은 단지 인권 문제만이 아니라 미사일.핵 개발 문제가 관련되어 있었다. 지금 북한의 핵 개발과 미사일 발사가 논란이 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은 지난 8월 24일 처음으로 로켓 발사 실험을 했다. 안보는 모든 분야에서의 안정과 발전을 담보하는 가장 근본적인 도구가 된다. 그러나 안보를 위해 개발하는 무기들 특히 미사일과 핵무기는 그것이 평화적으로만 사용된다는 보장이 없다. 박태균〈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현대사>

2009-09-24

[그때와 지금] 일 황실박물관장 순종 황제 알현···전국의 우리 문화재 유출 본격화

평소 골동품이나 문화재에 관심이 있던 사람이든 아니든 외국에 나가면 으레 박물관을 찾기 마련이다. 박물관 유물이 그 나라의 문화를 가장 잘 보여준다는 통념이 폭넓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재는 어떤 나라와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게 해주는 핵심 매체다. 그런데 미국이나 유럽의 박물관을 보고 온 사람들은 일단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압도된다. 돌아와서는 박물관이 잘 되어 있어야 선진국이라고들 입을 모은다. 그러나 유감스럽지만 한국이 앞으로 수십 년간 고도 성장을 지속한다 해도 그런 박물관이 생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인류 문명의 정수를 모아놓은 거대 박물관들은 제국주의 팽창의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시대 열강의 문화재 약탈은 식민지에 관한 정보수집 활동의 일환이었다. 또 그것들을 모아놓은 박물관은 자국의 국력을 과시하는 전시장이었다. 그래서 남을 지배하고 연구한 경험이 있는 나라의 박물관과 남의 해석 대상이 된 나라의 박물관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1908년 9월26일 일본 황실 직속인 제실박물관 총장 마타노 다쿠가 박물관 미술부장을 대동하고 서울에 들어와 순종 황제를 알현했다. 이 무렵부터 일본의 한국 문화재 '수집' 활동이 본격화됐다. 그들이 한국 문화재를 정당하게 수집했는지를 따지는 일은 무의미하다. 그들은 줍고 훔치고 빼앗고 얻고 사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한국 강점 직전인 1910년 4월에는 대한제국 제실박물관의 스에마쓰 구마히코 부장을 시켜 전국의 문화재를 수집해 오게 했다. 군수들에게는 '보물을 가진 인민은 군청에 가지고 와서 유래와 역사를 상세히 설명하도록 알리라'는 훈령을 내렸다. 그렇게 수집한 문화재의 상당수가 일본으로 흘러갔고 한국 강점 이후에도 문화재 반출은 계속되었다. 1909년 11월에 개관한 대한제국 제실박물관은 일본의 한국문화 '연구'를 돕는 구실을 했다. 그러니 오는 11월의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을 마냥 기꺼워만 할 일은 아니다. 우애주의를 내세운 일본의 하토야마 신내각은 과거사 문제에도 전향적인 자세를 보일 전망이다. 우리 정부도 대일관계 개선에 적극적이다. 그러나 독도.위안부 문제 말고도 양국이 함께 풀어야 할 숙제는 너무 많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

2009-09-23

[그때와 지금] 금붙이·빠른걸음으로 출세한 이용익, 민족의 긴 미래 보고 학교 세우다

조선왕조 때 아이들이 부르며 놀던 '승경가'. 권력의 실재에 따라 벼슬자리의 높낮이를 매긴 옛 동요는 세태를 잘 반영한다. "원님 위에 감사/감사 위에 참판/참판 위에 판서/판서 위에 삼정승/삼정승 위에 만동묘지기." 모화사상이 사회 저류에 흐르던 세도정권 시절. 임진왜란 때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명 신종을 제사 지내던 만동묘 묘지기의 위세가 하늘을 찔렀다. 이 땅의 임금이 황제가 되자 아이들은 "만동묘지기 위에 금송아지 대감"을 이어 불렀다. 그때 '금송아지 대감'은 임금의 호주머니 돈을 떡 주무르듯 주무른 내장원경 이용익(사진.1854~1907)이었다. 그가 출세가도에 오르게 된 연유를 1930년 7월호 '삼천리'는 이렇게 전한다. "그는 갑산금광에서 송아지만한 금덩이를 태황제와 명성황후에게 여러 개 바쳤고 또 황후가 대원군 세력에 쫓기어 한밤중에 향리 여주로 몸을 감출 때 다리 힘이 절륜한 그가 나는 새와 같이 황후의 몸을 안고서 하루에 천리를 갔다." 평안도 사람과 함경도 사람은 과거에 급제해도 관직에 오를 수 없던 시절. 함북 명천의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던 그는 금붙이와 빠른 걸음을 사다리 삼아 왕실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청렴하고 재간이 있었다. 도포 자락이 해진 것을 입고 다녔다." "개인적 욕심 때문에 돈을 탐하는 일이 없는 매우 질소한 인물이자 고종에게 유일무이의 충신이었다." 황현과 하야시 일본공사의 인물평처럼 사복을 채우지 않았고 충성심이 강했기에 1904년 그는 왕실 재정을 맡는 내장원경에 더해 나라의 재정운영권과 군권까지 손아귀에 넣은 탁지부 대신과 군부대신을 겸한 무소불위의 최고 권력에 올랐다. 이용익은 냉엄한 국제정치의 판세를 잘못 읽고 남의 힘에 기대 생존하려는 잘못을 범했다. "열강으로부터 보장받지 못한 조약이란 쓸모 없는 것이라는 점을 귀하는 모르십니까? 만약 귀국이 스스로를 지키지 않는다면 그들이 왜 당신들을 지켜주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우리가 중립적이라는 사실과 우리의 중립이 존중되기를 바란다고 발표했습니다. 우리는 미국과 약속을 했지요. 무슨 일이 있어도 미국은 우리의 우방이 되어 줄 겁니다." 러일전쟁이 터지기 직전 그가 매켄지와 나눈 대화는 그때 대한제국이 왜 망했는지를 잘 말해준다. 그러나 1905년 보성전문학교를 세워 민족의 미래에 대비하려 한 혜안은 빛났다. 이준에 앞서 헤이그로 가려 했던 그는 1907년 "학교를 널리 세우고 인재를 교육해 국권을 회복하시라"는 상소를 남기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숨을 거두었다.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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